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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670년 전,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북조와 남조의 두 왕조가 존재하며 서로 패권을 다투던 시절이다.당시 가마쿠라 막부 제14대 집정관 호조 고토키(北条高時)가 옹립한 북조(北朝) 초대 광무제(光厳帝)도 남북조 시대 동란으로 재위와 유폐를 두 번이나 경험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의 끔찍한 일화로는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할 때 광무제는 자신도 부상을 입고 400명 이상의 가마쿠라 무사들이 자결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 후의 동란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에 가슴 아파한 光厳帝는 삭발하고 법황이 되어 동란으로 희생된 전사자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수행승 순각(順覚)을 거느리고 행각의 여정을 떠났다. 그 말년, 그 행각의 여정에서 송오고개를 넘어 도착한 곳이 지금의 산국장, 현재의교토시 우쿄구 교호쿠의 땅였다.
교황이 상계천(上桂川, 대堰川)의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산길을 따라 올라갈 때, 시야가 확 트였다. 경북의 산과 마을의 아름다움, 물의 풍요로움을 보시고 "보라, 순각(順覺)이여. 이 곳에서 산은 북쪽을 막고 물은 남쪽을 향해 흐르고 있다.일곱 꼬리 일곱 골짜기, 저 산골짜기에는 분명 여래나 보살이 있을 것이다."(『교토부 교호쿠초 고향의 재발견』/후루사토 교호쿠 호코스기주쿠 발행 참조)라고 감탄했다,근처에 있던 돌에 앉아 한참 동안 이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라고 전해진다.
가미카치가와(오옌가와) 강변의 모습
그 후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가 지나가다가 광엄법황이 앉아 있는 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막상 일어서려는데 돌에 엉덩이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현지인들은 그 돌을,'광엄님 앉은뱅이 돌'이라고 부르며 귀석으로 존중했다.서민들이 앉는 것을 두려워하고, 앉으면 엉덩이가 붙는다는 소문을 듣고 절대로 앉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광엄고도의 귀석 앞을 지날 때, 마을을 떠나는 사람은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고, 마을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무사안녕을 감사했다.라고 묻는다.
광엄황제 좌대석
앉은뱅이 돌 부근에서 바라본 경북 마을의 모습
경북 산국으로 들어간 광엄법황은 이곳에 은거하며 상조황사를 열고 입적할 때까지 지냈다.상조황사에는 산골에 사는 형을 위로하기 위해 동생 광명천황이 가져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는 벚꽃 '구중벚나무'가 있으며,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조황궁
그동안 가혹한 운명에 휘둘려온 교황이기에 이 푸르고 물이 풍부한 산골 마을에 안긴 최후의 보금자리가 얼마나 평안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그리고 광엄법황이 앉았던 길가의 돌은 지금도 광엄고도의 귀중한 돌인 '앉은뱅이 돌'로 소중히 안치되어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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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거리 곳곳에 존재하는 전승. 1200여 년의 세월을 거쳐 탄생한 '마하'의 신비로운 교토의 '이'세계를 월간지 Leaf에서 '교토의 마계탐방'을 연재했던 오피스 TO의 두 사람이 실제로 그 곳을 방문하면서 풀어본다. 풀어간다.